초막집의 살송곳과 골풀무

- 프롤 로그-

본지는 조선시대 정사 및 야사에 수록된 인물들중  관습과 법도를 초월 한 자신만의 소신과 철학으로 세인들게 회자된 별난 삶을 살아온 인물기행을 연재한다.

우선 조선시대의 여러 인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해 기존의 역사서와는 확연한 차별성을 지닌 조선조 시대를 살아간 노비, 평민, 정승과 임금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남긴 삶의 발자취와 다양한 삶의 모습을 조명한다.

역사속 인물 조명은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등 조선왕조의 정사(正史)와 야사(野史) 중 후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깨치고 알아야 할 교훈적이고 가치를 지닌 이야기를 찾아내  우리가 배워야 할 인생의 처세술과 삶의 지혜를 밝혀 내기 위해서다. 다

◇ 첫번째 이야기 ..송강 정철과 관기 강아의 플라토닉 러브

중국 두보에 버금가는 조선조 당대 시인이며 대문학가인 송강 정철은 관기 강아와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나눴다.

송강 정철 초상화
송강 정철 초상화

 

강아는 원래 이름이 진옥이지만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의 ‘강(江)’자(字)를 따
강아(江娥)라고 불렸다.

강아는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松江妾)'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시조 문헌중에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오직 강아 뿐이다..

대개는 기녀가 속한 지명을 따라 남원명기, 평안기생 등 기명을 적었으나, 강아는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송강첩'으로 기록돼 있다.

강아와 송강의 만남은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가면서 첫인연을 맺게된다.

정철은 당시 불과 십여 세 남짓의 어린 소녀, 강아에게 머리를 얹어 주고 하룻밤을 같이 할수도 있었으나, 청렴 결백했던 정철은 어린 강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다만 명예로운 첫 서방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정철의 인간다움에 반한 강아는 어린 마음에도 그가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정철 또한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마음으로 사랑하며 한가할 때면 옆에 앉혀 놓고 틈틈히 자신이 지은 사미인곡을 외어 주고, 장진주 가사를 가르쳐 주며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즉  정철과 강아는 육체적인 애로스 사랑보다 정신적인 플라토닉 사랑을 한셈이다.

강아는 기백이 넘치고 꼿꼿한 정철을 마음 깊이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82년 9월, 도승지로 임명받은 정철은 열 달 만에 다시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강아는 그를 붙잡을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 채, 체념의 눈물을 흘릴 뿐 이었다.

그러한 강아의 마음을 눈치챈 정철은,작별의 시를 주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한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백일홍) 곱게 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네.

그 시에는 강아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당부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좋은 낭군을 구해서 시집을 가 잘 살고, 자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철부지 어린 나이에 머리를 얹은 이후로 단 한순간도 그를 잊지 못했던 강아는 관기(官妓)노릇을 하면서도 다시 정철을 만나겠다는 열망으로 십년고절의 세월을 버텨낸다.

기생의 처지로 다른 남자의 유혹을 거부하며 수절을 한다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정철이 북녘 끝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소식을 들은 강아는 이제야 정철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귀양살이를 하는 정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서둘러 행랑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처녀의 몸인 강아는 작고 예쁜발이 붓고 갈라지면서도 오직 정철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삼천리 길을 걸어 강계로 달려온 강아는 위리에 안치되어 하늘 한자락 보이지 않게 가시나무로 둘러쌓인 초라한 초막에 홀로 앉아 책을 읽는철의 초췌한 모습에 진주같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자기 앞에 엎드려 우는 어여쁜 여인을 본정철은 당황하며 그녀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도 그럴것이 10년전 강아는 십여 세 안팎의 어린 소녀였으니 이제는 탐스런 여인성장한 강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유배지의 적소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 오고 달이 떴다.
달빛 아래 엎드려 우는 여인을 보던 정철은 그네의 모습이 한 마리 백학처럼 느껴졌다.

울음을 그친 강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를 몰라보시는지요?
10년 전 나으리께서 머리를 얹어 주진 진옥이옵니다.
​강아는 그를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과 귀양소식을 듣고 적거(謫居)생활을 보살피고자 부랴부랴달려왔다는 것을 고백했다.

대 정치가이자 일세의 문장가인 정철의 유배생활은 보기에도 가혹해 보였다.

정철은 실의와 비탄 속에서도 꼿꼿한 자세로 모든 현실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침침한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강아는 정철을 앞에 두고도 정녕 믿기지 않았고,
정철은 강아를 볼수록 살풋한 여인의 향기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말을 잃은 두 연인, 방안엔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는데...

그때 조용히 강아가 입을 열고 어린 시절 정철에게서
듣고 외웠던 ‘사미인곡’ 과 ‘장진주’가사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네가 아직도 외우더냐?” 정철이 물었다.

“예, 나으리께서 배워 주신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나으리가 그리울 때면 가야금을 타고 마냥 불렀던노래이옵니다.”
강아의 뺨은 홍시처럼 물들고 있었다. ​술상을 마주하고거나해진 정철이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화답하거라.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옥(玉)이 옥이라 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탁월한 시인이었던 정철은 강아에게 흠뻑 빠져노골적인 음사(淫辭)를 시의 옷을 빌어 읊었다.

번옥이란 분명 진옥을 은유한 것으로 남녀간의 육체적 합일을 바라는 정철의 육정이 배어 있는 시인데 지체없이 강아가 화답한다.

"철(鐵)이 철(鐵)이라거든 석철(錫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마침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강아의 시는 당대의 대 문장가인 정철을 깜짝 놀라게 했다.

강아는 정철을 쇠로 비유하며 멋지고 견고한 남성을 만나면, 자신의 골풀무로 녹여 놓을 수 있다며 응수했다.

'골풀무' 란 불을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인데, 강아는 이를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性器)'로 은유하는게 아닌가!

이만하면 강아는 '명기(名妓)'요, 뛰어난 시인이다.

이윽고 살송곳을 가진 멋있는 사내와 뜨거운 골풀무를 지닌 기생의 하룻밤은 뜨거운 정염으로 깜깜한 밤이 새하얗게 무르익어 갔다.

이는 야사가 아닌  정철시조집 인 권화악부(權花樂府)에 '鄭松江 與眞玉‘수답(酬答)의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날 이후, 정철의 적소생활은 조금도 괴롭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강아는 늘 그의 곁에서 기쁨을 주었고, 가야금을 연주해 주었다.

그러면 헝클어진 정철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흘러들었다. 강아는 단순한 생활의반려자 혹은 기녀가 아니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예술적 호흡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정철은 유배지에서 부인 안씨에게 서신을 보낼 때면 강아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냈다.

부인의 서신 속에도 강아에 대한 투기나 남편에 대한 불평보다는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강아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

불우한 남편의 생활 속에서 남편에게 위로를 주는 여자라면,조금도 나무랄 것이없다는 부인의 글을 받고 정철은 고마워했다.

강아 역시 부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고마워하며 더욱더 알뜰히 정철을 보살폈다.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뜨거운 애정의 강물이마음 밑바닥에서부터 교류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강아 묘비
강아 묘비

선조 25년,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정철을 서울로 부른다.

정철은 유배지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과 나라에 대한 우국,강아와의 이별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정철을 보내면서 강아는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슬프다 !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닯다 !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 뿐이네.

부인 안씨는 강아와 함께 한양에 올 것을 정철에게 권했지만,

강아는 거절하고 강계에서 혼자 살며 정철과의 짧은 사랑을 되새기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이듬해 선조 26년(1593) 12월 18일, 정철이 강화의 우거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이 세상에 정철이 없다는 가혹한 슬픔 앞에 몸부림치다가 홀연히 강계를 떠났다.

그 후, 강아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송강마을에는 송강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더불어 강아의 무덤이 있다.

무덤 앞의 묘비 전면은 의기 강아묘 '義妓江娥墓'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엔 다음 글이 새겨져 있다.

'江娥 松江 鄭澈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시 남원의 동기인 紫薇(자미.백일홍)를사랑하자 세상사람들이 松江의 字를 따서 江娥라 불렀다.

이러한 강아와 당대 대문장가인 정철의 세월을 초월한 사랑은 후세들께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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