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농소면에서 공무원 시작 공직생활중 가장큰 소득 은 지금 아내만난것 ▲ 6형제중 다섯째 로 태어나 중학교시험치고자30리길 걸어가

무소속으로 김천시장에 당선된 김충섭시장

보수강풍이 심했던 안방 김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시장에 당선된 김충섭당선자는 수술후 죽을고비를 3번 넘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인생역전 승리자다.

그는 명문 김천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인연으로 김천시장 타이틀을 따낸 전화위복 주인공이다.

특히, 김충섭 당선인은 자유한국당 텃밭이나 다름 없는 김천에서 박팔용 전 시장에 이어 10여년만에 무소속 시장이 돼 화제의 인물이 됐다.

이는 김천도 구미처럼 후보 경쟁력은 무시한 채 자유한국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 이란 인식 아래 공천잡음을 야기한 자유한국당에 경종을 울렸다는 것으로 평가된다.

선거결과 김당선자는 40,775표(50.79%)를 얻었으나 한국당 공천자인 김응규후보는 27,098표(33.75%)를 얻는데 그쳐 김후보께 패했다.

당선 비결은 42년 공직에서 쌓은 행정과 경제, 문화, 복지, 도시계획 등의 폭넓은 경험을 강조하며, 꾸준히 유권자들과 소통해 김천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또한 그는 부족한 선거자금으로 시민참여형 선거모금펀드인 ‘김충섭과 함께하는 행복김천 펀드’ 출시, 일주일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시민참여 선거모금펀드란 정치후원금이 아니고 선거비용을 빌려준뒤 당선후 되갚는 형식으로 연령에 상관없이 시민누구나 참여가 가능한 펀드로 깨끗하고 투명한 선거를 위한 경북최초 시민참여펀드로 1억4천600만 원을 일주일여만에 전액 목표달성했다.

특히,이 펀드 동참자는 돈많은 기업이 아닌 어르신,노점상인, 주부와 아이들 등 잘 사는 김천을 만들어 달라고 소원을 담은 서민펀드로 시민들이 투자한 금액은 선거후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법정 선거자금을 보전 받은 다음날 인 8월 14일 경 부터 순차적으로 원금에 이자를 붙여 갚게된다.

▲ 산골동네 가난한 집안 6형제중 다섯째로 태어난 김충섭

김충섭 당선자는 1954년 경북 금릉군 농소면 봉곡리에서 6형제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금릉군 농소면 봉곡리는 지금은 김천 시내와 승용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시는 버스가 없어 두 시간 넘게 걸어가야 하는 외진 산골마을이었다.

출생한 1954년에는 당시 농촌의 환경은 매우 열악해 집집마다 아이들은 많았지만 대부분이 가난했다.
아버지는 공무원을 하다가 퇴직 후 농사를 지었지만 전답 보다 자식은 많아 살림살이가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조마면 삼산리에서 시집온 어머니가 농사지으랴 자식들 키우랴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너무가난해 여덟 식구가 방 두 칸짜리 좁디좁은 집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다 추운 겨울에는 온 가족이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의 체온으로 잠을 청해 오히려 이런 환경이 더 따뜻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김당선자는 초등학교 4학년 1964년 첫 김천 시내 구경을 했다.

4학년 이상 학생들이 단체로 ‘빨간 마후라’ 란  전쟁영화를 보고자  20여리 비포장 길을 흙먼지를 덮어쓰면서 김천시내로 향했다.

시골촌놈 김충섭이 난생 처음 가 본 김천시내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신세계였다.  커다란 이층집들,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증기 기차, 빨간 칠을 한 버스 등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지금의 김천교를 그때는 감천 큰다리라고 불렀는데 “세상에 저렇게 큰 다리도 있구나!”하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며 지금보니 너무작았다고  술회했다.

김충섭 김천시장 당선자가 당선후 부인과 환호하고있다.


▲ 죽을고비 3번 넘겨  다시 태어난 삶 큰욕심없이 살아
김당선자는 지금은 중학교 입학시험이 없지만 당시 중학 진학시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중학교 진학을 할수있어 초교 6학년 때 방학도 없이 보충수업을 했다.

버스가 없던 당시에  입학시험을 보러가기 위해 추운 겨울 봉곡 고향집에서 30여 리 비포장길을 형님의 자전거 뒤에 타고 시험장까지 갔다. 그렇게 시험에 합격하고 남산동에 있는 사촌 형님의 집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사촌 형님은 사방관리소에 다니며 자신을 친동생처럼 대해줘 지금도 형님과 형수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잊지않고 있다.

하지만 중학 졸업후 고교 진학을 앞둔 겨울 죽을 고비를 넘겻다.

몸에 큰 병이 생겨 세 번이나 큰 수술을 했다.  모두가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았고 건강 회복을 위해 한 해 동안 휴학을 하게 되어 동급생보다 1년 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건강상 학업에 지장이 많았지만 김천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했지만 가정형편으로 대학을 포기한체 먹고살기 위해 고향 농소면사무소에서 첫 공무원을 시작했다.

그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1974년 2월 5일 함박눈이 쏟아지던 던 날 금릉군 농소면사무소로 첫 출근을 했다.

첫 월급은 1만 8천원으로 100원짜리 지폐가 한 봉투 가득했다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번 돈이라 부모님께 드렸더니 앞으로 돈을 더 모아 대학에 가라고 하시면서 적금을 들어 주셨다고 말했다.

면사무소의 공무원 생활은 새롭고 즐겁기도 했지만 쉬는 날도 없이 바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비상근무의 연속으로 이는 국정의 제일 목표가 ‘식량자급 달성으로 통일벼 재배 독려와 새마을 사업 등 바쁜 면사무소 생활로 좀더나은곳을 택해보고자 군 본청 전입시험에 합격해 내무과에 근무하게 됐다.

▲내 인생중  가장큰 행복은 지금 아내와의 인연
김충섭 당선자는 소문난 애처가다.
지금의 부인도 당시 군청 근무시 만난 사람으로 내인생 가장 큰 소득은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인연이라고 말한다. 당시 아내는 양정계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첫 눈에 반해버렸다.

당시는 연애가 흠이 되던 시절이라 연애 한다는 소문이 나자 나와 아내를 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 않아 할수없이 아내가 농협으로 자리를 옮겨 눈치 안보고 연애를 하다가 결혼했다.

▲ 경북도청 전입시험합격해 기획전문가로 변신

김당선자는 금릉군청에 근무할 당시 자신를 신임한 군수가 경북도청으로 가서 근무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경북도청 전입 시험을 본후 합격해 1979년 10월 25일부터 도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경북도청 근무시는 기획전문가로 변신해 시군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기획으로 한 부서에서 8급에서 사무관까지 14년간 근무한 기록은 자신과 2명분으로 도청역사상 진기록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청기획전문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천혁신도시 건설과 1조원 예산 시대 개막으로 경북 중심도시로의 위상 회복에 온힘을들여 나갈방침이다.

김당선자는 “김천시가 예산 1조 원 시대를 맞아 이 엄청난 예산을 어떻게 집행하느냐에 따라 김천의 미래가 달라진다”며, “그 예산을 정치적인 쇼에 투자해 낭비하면 김천의 미래는 없어 김천의 미래와 우리 자식, 후손들을 위해 투자해 나가겠다”며, “혼자 가면 길이 되지만 함께 가면 역사가 된다”고 말했다.

한편 김충섭 당선인은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진전문대에서 행정학을 전공한후 김천, 구미 부시장과 경상북도 문화관광체육 국장, 청소년 수련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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