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주의와 기계화 경제학이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전락
성장보다 환경과 인간성 회복이 더 중요

-프롤로그-  본지는 ‘톺아보기’ 란을  신설해 정치.경제,사회,기타등 신문기사등을 통해 사회적 이슈가 되는 문제를  발췌해 독자들께 전달한다.  

우선 ‘작은것이 아릅답다’는 영국의 환경운동가이며 경제학자인  에른스트 슈마허의 시상과 경제관을 연재한다.

요즘같이 공룡이 돼버린 대기업과 재벌 총수들의 윤리경영․지속가능경영의식이 극히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슈마허의 ‘작은 기업’ ‘착한 기업’의 실천은 오늘날 기업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생각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본다.

좌로부터 슈마허,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빗 소로,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이반 일리치. 출처: 위키피디아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좌로부터 슈마허,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빗 소로,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이반 일리치. 출처: 위키피디아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것이 아름답다..지상성장주의 비평문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영국경제학 에른스트 슈마허의 역작이다.

슈마허는 경제 성장이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와 인간성 파괴라는 결과를 낳는다면, 성장지상주의는 맹목적인 수용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과 반성의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경제 구조를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방안으로 '작은 것'을 강조한다.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 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 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 노동과 자원을 이용한 소규모 작업장을 만들자고 제안하며 더 작은 소유, 더 작은 노동 단위에 기초를 둔 중간 기술 구조만이 세계 경제의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간 기술이란 인간을 생산 과정에 복귀시켜 생존수단의 부재로 빈곤에 시달려온 많은 이들을 구제할 방법으로, 대량 생산 대신 대중에 의한 생산을 이루어줄 유일한 대안이다.

슈마허는 실제 경험이 없는 이론화에 불만을 느낀 그는 여러 분야에 진출하여 기업가, 언론인 경제학자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전쟁 중에는 옥스퍼드에서 잠시 학업을 재개했다.

독일의 영국 점령지역 통제위원회 경제 자문관, 영국 석탄공사 경제 자문관, 영국 토양협회 의장, 스코드 바더 사의 이사를 역임했으며, 개발도상국을 위해 중간 기술 개념을 창안하고 중간기술개발집단을 설립하여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농촌 개발에 대한 그의 권고안은 수많은 외국 정부로부터 주목받았으며 활발한 학술 활동으로 1974년에는 대영제국 지도자 훈장(CBE)을 받았다.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되는 슈마허는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하나의 참조 틀 속에 버무릴 줄 아는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 성장보다 환경과 인간성 회복이 더 중요

슈마허는 현 경제의 당면 과제는 성장이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을 통한 환경과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역설한다
현대인들은 생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으며, 부국의 중요 임무는 여가 교육이고, 빈국의 임무는 과학 기술의 전수라고 말한다.

정치가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경제 성장이 전제해야 된다며 성장제일주의로 자신들의 체제를 수호하려 한다. 그러나 2020년대에 접어둔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을 돌아보면 인류 평화의 전망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하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밑천으로 살아왔으나 이제 그 한계에 다달했다는 징후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한 예로 화석연료의 고갈을 들 수 있다.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로 인한 공해 문제와 자연의 불균형은 이미 위험 수치를 넘어섰다.

이처럼 거대 조직화와 전문화를 진척시키는 개발 논리가 경제적 비능률과 환경 오염, 그리고 비인간적인 작업 조건을 낳았다.

◇ 거대주의와 기계화의 경제학이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전락

오늘날 사용되는 비난의 어휘 중 비경제적이란 말처럼 결정적인 것이 없는데, 우리는 경제적이라는 말을 질은 무시한 채 주로 양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에 길들여져 왔다.

따라서 크고 많은 것이 좋다는 거대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퍼져, 정치·경제·사회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규모의 문제가 1차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부국에서도 빈국에서도 거대주의가 낳은 비극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은 급격한 산업화 중에 도시와 농촌의 균형 있는 개발에 실패한다면 국가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현대 경제계산에는 인간이 빠져 있다. 그래서 기계화를 서두르고 더욱더 큰 단위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때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 거대주의와 기계화의 경제학이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전락시키기고 있는 것이다.

현대 경제의 테두리에는 '인간'이 빠져 있다
성장을 위한 경제 체계보다 인간을 위한 경제 체계가 더 절실히 필요하다는 증거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원자력은 이미 수십 년 전 그 위력과 비극을 입증했고, 핵 원자로가 만들어내는 대량의 방사능 폐기물로부터 안전한 곳은 지구상에 없다. 또 지난 사반세기 동안의 고도 성장이 실제로 모든 인류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주었는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세계 인구의 5.6%를 차지하는 미국인은 전세계 1차 자원의 40%를 소비한다. 단 5.6%가 40%의 1차 자원을 사용하는 현 공업 체제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

◇ 정교한 손과 창조적인 두뇌를 가진 인간을 생산 과정에 참여시켜라

진정한 경제 발전은 대중에 의한 생산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후진국이 선진국의 생산소비 패턴에 종속되어 생기는 의존 상태다. 서구의 경제 구조가 원조와 협력의 이름으로 이식되어 벗을 수 없는 종속의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다.

이것 역시 거대주의에 대한 우상숭배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합당한 곳에서는 작은 것의 미덕을 강조해야 한다. 모든 나라가 미국이나 독일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제3세계는 그들에게 알맞은 인간성을 가진 기술, 즉 중간 기술을 통해 새로운 기술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

이 중간 기술이란 대량 생산 대신 대중 생산을 목적으로 하며 정교한 손과 창조적인 머리를 가진 인간을 다시 생산 전과정에 복귀시킨다. 이 중간 기술은 모든 생산 목표를 다수의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방향으로 이끌며,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이며 또한 노동력을 많이 요구함으로써 기본적인 생존수단을 갖지 못해 빈곤에 시달려온 많은 이들을 구제할 수 있다.

◇ 지역 노동과 자원을 이용한 소규모 작업장형성

공공소유, 작은 노동 단위에 기초한 구조만이 진정한 경제 발전을 가져온다
물론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행성 이론이라 논박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량 학살, 몰락, 오염, 고갈, 기아 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본은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근본적 출발점에 다시 설 필요가 있다. 즉 인간 중심의 경제가 절실히 요구된다. 인간은 우주의 한 작은 기능이며, 따라서 작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거대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 파괴로 치닫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인간 생활의 본질적 선결 조건이 되는 공기, 물, 토양 같은 천연자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에 따른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 중간 기술의 개발, 그리고 각 국각의 노력인 것이다. 지금 경제학의 당면 과제는 성장이 아니다. 경제이론, 경제사상, 경제정책이 지향해야 할 것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 슈마허의 사상적 계보

슈마허는 인간과 과학기술 이해를 바탕으로 ‘보다 빨리, 보다 많이’라는 대량생산, 물량주의를 신봉하는 거대기술이 아니라 간디가 제창한 ‘대중에 의한 생산’을 신봉하는 민주적 기술, 적정기술을 제안한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다 하버드대를 나온 수재였던 그가 졸업과 동시에 산속에 오두막집을 짓고 2년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파격’이다.

그가 문명을 버리고 숲속으로 들어간 이유란 아주 간단했다. ‘인생을 나의 의지대로 살아보고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에 직면해 보기 위해서’였다. 소로는 숲 속의 생활에서 문명을 버린 인간의 생활에 대해 들려준다.

자기가 기거할 집을 손수 짓는 일부터 시작해 나무를 잘라 목재로 다듬고, 주위의 허름한 집에서 나온 자재들을 재활용하고, 꼭 필요한 물건만 시장에서 구입한다. 집이 완성되고 그가 기거하는 동안, 사람과 멀어졌지만 그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가장 애착이 가는 벗은 월든 호수였다. 그가 월든 호수로 자주 산책을 나갔기에 숲속엔 길이 나고, 지금도 그 길이 남아있다.

소로는 일상화된 산책 중에 숲속의 친구들과 대화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고요한 가운데 책을 읽고, 명상에 빠져들었다. 그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던 당대의 인간들 속에서 비켜나 가난하고 누추하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자연 속에서 나름의 삶을 설계했다.

그 뒤  월든은 미국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치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간디다.

간디의 무소유 철학은  월든에 일정부분 빚지고 있다고 하겠다. 빠르고 세련되고 풍요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인간은 달려왔지만 그 자체가 행복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삶이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대안 찾기에 고심했을 터이다. 이러한 간디의 무소유 사상이 바로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또 한사람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스콧 니어링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반전평화주의자, 생태주의자로 대학 교수직에서 해고된 뒤 부인 헬렌 니어링과 함께 메인주의 버몬트 숲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 집필과 자립적인 농경생활을 했고, 100살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함으로써 ‘조화로운 삶’ ‘소박한 삶’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 줬다.

◇  왜 슈마허인가..묻는다면

1970년대 슈마허가 제기한 이 물음은 오늘날 경제성장지상주의와 세계화, 양극화로 치닫는 세계 경제 상황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그의 경제학은 지금도 현재형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속가능한 발전도 이미 슈마허가 간디에 이어 ‘영속성’이란 개념을 통해 강조했다.

주류경제학에 대놓고 ‘경제학의 존재이유’를 묻고, 인간의 모습을 한 경제를 강조한 학자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인물로 슈마허 같은 사람을 꼽기가 쉽지 않다.

슈마허는 통계학자, 경제학자, 공무원, 기업가, 언론인, 작가, 사상가로 두루 넓게 삶을 살았다. 슈마허는 실제로 영국 토양협회 고문을 거쳐 스코트바더사(Scott Bader)에서 경영진으로 참여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해서도 괄목한 성과를 보였다.

종업원지주제와 종신고용제 또는 사내임금격차 해소 등 오늘날에도 시도하기 어려운 진보적인 경영실험을 했고, 모두 성공했다.

100년에 가까운 기업의 역사를 가진 스코드바더사가 지금도 ‘소규모’로 글로벌시대에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울 뿐이다.

요즘같이 공룡이 돼버린 대기업과 재벌 총수들의 윤리경영․지속가능경영의식이 극히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슈마허의 ‘작은 기업’ ‘착한 기업’의 실천은 오늘날 기업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생각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왜 슈마허인가라고 묻는다면 인생후반전을 시작하는 마당에서 우리시대의 좌표를 새롭게 보고, 내 삶의 대안을 찾기 위한 나침반으로서, 우리시대, 우리 삶의 멘토로 슈마허를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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