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세 천수 누린 백선엽 .. 36년 먼저간 박원순

최근  우리나라는 두사람의 죽음을 두고  몹시 시끄럽다.

공보다 과에 치중해 상중에도 욕설이 난무한다.

한사람은 100세 천수를 누린 반면 또한명은 불미스런 일에 연류돼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 두사람의 죽음을 두고 우리국민들이 애도해야 될 입장이지만 보수와 진보란 진영 논리로 과거 친일행적까지 들먹이며 애도는 뒷전인체  욕설천지다.

보수진영의 전쟁 영웅이란 찬사에도 정의당은  “백선엽씨는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이 조선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세운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한 장본인”으로 현충원 안장을 반대했다.

반면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백 장군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초석을 다졌던 진정한 국군의 아버지로 이런분을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냐“고 반발했다.

옥에도 티가 있듯이 사람은 신이 아니라서 때와 환경에 따라 본의아닌 행동을 할수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고모부나 형도 개처럼 죽이는 인간백정 북한의 실정에는 침묵하며 캐캐묵은 과거지난 친일행적에는 침소붕대해 날선비판 으로 공적보다 흠집내기에 앞장 서는게 진보 진영이다.

친일행적을 지적하려면, 친북행적도지적해야 공평하지만 현실은 과거 친일행적만 비판할뿐 3대세습 인간 백정나라 북한에는 입을 다문다.

백장군은  친일 행적보다는 그가 1951년 해방전쟁 시기 지리산 일대에서 구한 수만의 생명의 무게가 훨씬 크다.

백장군은 1951년 11월 말부터 1952년 3월까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쥐잡기 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계급은 소장으로 이 시기 백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이하 백야사)를 설치하고 지휘를 맡았다.

백야사는 기존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을 맡던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와 각급 경찰부대 병력에다 새로 최전방에 있던 국군 수도사단과 제8사단으로 구성된 부대다.

백야사의 1차 작전은 1951년 11월 말 전남 일원에 계엄을 선포한 뒤 12월 2일 아침 6시에 개시돼 12월14일까지 진행됐다. 이 기간 백야사는 전과로 사살 940명, 생포 1600명을 기록했다. 이어 2~·4차 작전이 연이어 전개된 후 1952년 3월14일 모든 작전이 완료됐다.

당시 전과에 대한 기록은 전사편찬위원회가 1988년 발간한 ‘대비정규전사’에는 사살 7737명, 생포 7993명, 귀순 506명으로 기록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10년 조사보고서를 통해 사살 6606명, 포로 7115명으로 집계했다.

하지만 이런 공식 통계는 최소치로  실제 백선엽도 회고에서 “실제 사살 및 포로는 추정 숫자를 훨씬 상회했다. 이는 공비들의 세력이 강력했고,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도 많았음을 반증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투항하거나 생포된 입산자들은 광주포로수용소와 남원포로수용소에서 분류 작업을 거쳐 광주법원재판에 회부되면서 처벌을 받았다.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되면서 우익의 학살을 피해 모여들기 시작해 지리산 일대에는 1950년 11월 경 5만 명을 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또한 백야사의 작전이 시작됐던 1951년 초겨울 무렵 지리산과 백운산 등 야산자들도 적어도3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의 증언이 맞는다면 백야사의 작전으로 최소 3만 명 이상의 야산자들 가운데 사망자를 1만 명으로 셈한다고 해도 세명중 두명은 목숨을 건진 셈이다.

실제 이 시기 선무공작을 우선했던 백야사의 방침으로 최연소 빨치산이라고 했던 조선대 박현채 전 교수나 소설 남부군의 이태 선생 등이 목숨을 건졌다.

이는 내전초기 수만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들을 사전 예비적으로 학살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 되는 부분이다.

즉 내전 초기 학살과 1년 6개월여의 치열한 내전으로 증오심이 극대화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1년 6개월여 후 펼쳐진 백야사의 동계작전은 사살이 우선이 아닌 생포와 귀순을 우선하는 선무공작에 치중했다는 점이다.

이는 백선엽이 젊은 날 일제하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항일연군을 향해 총을 겨눴다는 ‘과’와는 비교를 할 수 없는 크나큰 ‘공’으로  2만 명이 넘는 목숨 값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선엽이 당시 지리산 공비토벌에 나서지 않았다면, 지리산에 들어간 우리양민들의 목슴은 공비들에 의해 죽을것으로 이러한 백선엽의 공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공보다 과거친일 행적에만 치중해 흠집내기 일색인 진보세력들은 애도 기간에는 욕설보다 애도하는게 인간적 예의다.

이는 박원순도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공이 과 보다 클때  상중에는 애도는 못할망정 욕설은 자제 하는게 고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도리다.

경북 탑뉴스는 연합 뉴스와 기사 제휴 매체 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 탑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