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말하는 구상시인 철학은 한마디로 우주적 연민
-구상의 꽃자리와 피아(彼我) 구별않는 구상의 人間愛
-친구 박정희 정권참여 권유 피해 미국하외이대 교수 재직

칠곡군구상문학관

구상은 북한이 고향으로 월남해 칠곡군에서 20여년간 기거했다. 시인이 가족과 함께 20년 이상 머문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는 ‘구상 시인과 이중섭 화가 우정의 거리’도 조성된다.

지금은 고인이된 구상 이지만 그의 시는 책을 통해 후세들께 전달돼 깊은 감명을 주고있다.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속에도 과거 보릿고개 시절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당시보다 물질은 풍부하면서도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더 피폐한 살을 살고있다.

신문,방송등 언론은 물론 자신과 뜻이 맞지않으면 옮고그름을 떠나 무조건 상대방 공격에나서 한솥밥을 먹는 식구끼리도 갈등과 반목의 연속이다. 

왜 이러한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을까. 이처럼 각박한 현실속에서  문재 구상은 ’니가 앉은자리가 꽃자리′라며 불만보다 만족을 강조하고 있다.

구상시인이 왜관생활중 짝은 부인,딸 사진

구상은 꽃자리란 詩에서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며, “이는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탄했다.

또한,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라고 노래했다.

이처럼 구상시인의 시의 세계에 대해 유일한 혈육인 구자명 작가도 부친에게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에 대해서 “세상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보다 저너머 안보이는곳에 더 많은 진실을 품고 있다며, 아버지는 목전의 이해나 판단에 갇혀 살지 말라고 해  지금도 그말을 실천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것 이라고 했다.

◇ 피아구별없는 구상의 인간 존중사랑

구상(1919~2004) 시인의 철학은 한마디로 우주적 연민과  유한한 인간이 가엾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 연민으로 그의 사상은  장애인은 물론 적군한테도 반감보다 온정을 베풀었다.

실제로 교과서에 나오는 구상 시 ‘적군 묘지 앞에서’는 구상은 북 공산주의 체제의 박해를 받고 월남했지만  6·25 때 전사한 적군 묘지 앞에서 목놓아 울었고 그 당시 우익은 물론이고 좌익도 이런 시를 쓰지 않았다.

벗을 사귐에도 구상은 직업이나 빈부귀천은 물론이고 신앙이나 이념의 구분을 따지지 않았다.

시인은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이 낸 동인시집 ‘응향′에 실린 시편으로 필화를 겪어 쫓기듯 월남했다. 부르주아 성향이라고 비판받은 것이다. 형 구대준 신부도 북에서 인민군에 체포돼 행방불명됐다. 

구상의 즉석시 밭 대구 지인집에 표고로 보관

◇ 박정희 전대통령의 술친구 구상

시인은 한국전 때 종군작가를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술친구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추종하지도 맹목적 반공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을 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반공법 위반으로 15년 구형을 받고 무죄로 풀려나기도 했다. 

친구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신문 기고로 비판하기도 했다.  딸인 구작가는  “아버지가 유신 선포 전에 박 대통령을 만나 말리려고 하셨어요. 하지만 차지철 등 박정희를 둘러싼 인의 장막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특히,구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에 간 뒤 10년 동안 가톨릭 위령미사도 지냈다. 이는 이념과는 별개로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한일인데  박근혜 전 대통령도 이 사실을 알았을 거리고 말한다.

구상시인묘소

◇ 영혼의 힘과 言靈

구상시인은 생전 대화시도 영혼의 힘을 느낀다고 말한다.  구상이 1980년대 중앙대 교수 재직시 한 원로작가가 어떤 분을 빨갱이로 몰자 부친이 그렇지 않다고 반론을 폈다. 

이로인해  원로작가가 아버지에게 의절을 선언한후 그뒤 중앙대생들이 이 원로작가 퇴진을 요구하며 작가 집으로 몰려가려고 했을 때는 아버지가 교문 앞에서 몸으로 막으셨다고 했다.

또한  “감방의 이상한 잡범들도 아버지한테 양아들 삼아달라고 부탁도해  그때마다 내치지 않고 늘 잘하도록 독려해 구상은 사람차별을 두지않았다.

이런 인품은 구상이  1971년에 쓴 시 ‘밭’ 전문에도 잘들러난다. 

“밭에서 싹이 난다.밭에서 잎이 푸르다.밭에서 꽃이 핀다.밭에서 열매를 맺는다.우리는 새새,심부름을 한다” 고 적어 밭안의 식물의 종류 보다 밭이란 큰틀을 보고있어 시적 기교보다 언령을 말해 영혼이 깃든시 같다.

달구자명 작가와 함께

◇ 박정희 정권 참여싫어 하와이 行

구상은 미국 하와이에서 교수생활을 8년간 했다.

구상이 하와이로 간것은  박정희 대통령 쪽의 끈질긴 정권 참여 요청 때문으로 이를 피해 일부러 하와이대 교수로 갔다고 딸은 말했다.

하와이로 가게된 동기는 구상과 친분이 있는 장택상 전 총리의 사위 대만인으로 하와이대 극동언어학과장으로 있어 가게됐다.

이와함께 구상 시인의 아내는 의사로 칠곡군 왜관읍에서 의원을 열어 환자들을 치료했다. 

구상 시인의 혈육은 현재 작가인 구자명씨 외 2남1녀였다. 그러나  생전에 2남1녀 중 2남을 잃었다.  장남은 시청 직원과 목재사업을 해 성공했지만 35살에 모든걸 접고 서재에서 독서와 명상만했다. 책을 5천 권 정도 읽었을때 갑자기폐렴에 걸려 치료를 했으면 살수있었지만 이를 거부해 사망했고 차남은 30대 중반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구상시인도 일본에서 폐수술을 두번이나 받을만치 집안은 기관지 계통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구상은 종교적 신념과 소신으로 세상사 부귀 권력을 쫒기보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에 더비중을 둔 言靈 詩人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상시인

오늘 / 구상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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