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의장손자 대구산격동서 어려운 생활.. 대출받아 왕산생가 구미시에 기증

구미가 배출한 왕산선생은 일제강점기 평리원 재판장(현대법원장) 출신이며 의병장 으로 일본 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로 알려졌다.

서대문형무소 첫 번째 사형수 인 왕산 허위는  1908년 10월 21일 정오. 경성감옥의 교수대에서 처형당했다. 교수대서 곧 죽을 목숨이었지만 그의 기개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왜승(倭僧)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하자 왕산은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묻자 죽은 뒤 옥중에서 썩어 없어지드라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며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는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왕산의  나이 53세였다.

■ 왕산 장손자들 어려운 환경에도 생가터 사들여 구미시 기증

구미시 임은동에 있는 허위 선생의 생가터는 옛 모습을 알 수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생가터는 선생의 장손으로 현재 대구에 살고 있는 허경성씨가 사비로 매입해 구미시에 기증한 것이다.

구미민족 문제연구소 장기태.박찬문씨가 최근 대구 산격동에 거주하는 왕산허위 선생 장손자 인 허경성옹(翁)을 찾아 허위선생 추모식을 거행했다.

10월 21일 가진 왕산선생 추모식에는 올해 100년이 지난 의병장 왕산의 업적을기리고 잊혀져 가는 왕산 후손들의 삶을 재조명 하기위해서다.

현재 왕산의 후손이며 장손인인 허경성 옹은 올해 92세로 대구 북구 산격동 골목안 상가주택에서 기거하며 어렵게 생활하는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허경성옹은 대구에 기거하며 넉넉치 않은 생활에도 불구 지난 2005년에 왕산공원터를 구미시에 기증해 2009년에 구미시가 공원으로 조성해 주민들이 있다.

기증한 생가터는 허옹 3형제가 대출을 내 생가터를 구입해 구미시에 기증한후 현재 대출금은 다 갚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허선생은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겨우 생활하며 자식들도 서울과 미국으로 흩어져 있어 살림살이는 넉넉한 살림은 아닌것 같다고 방문한 이들은 전했다.

게다가 왕산은 서대문 형무소서 순국한지100년(1908년 10월 21일)이나 지났지만 구미시는 지금껏 왕산의 공식적인 추모제 한번 안지냈다며 구미시에 울분을 토해냈다.

따라서 민족문제 연구소는 2018년 10월 21일 뜻있는 구미시민들과 함께 조촐하게 왕산 선생 추모제를 거행코자 대구에사는 왕산의 장손인 허경선 옹도 초청해 행사를 치렀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관계자는 ”이제부터라도 왕산 허위선생 일가를 비롯해 구미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고,그 분들의 고귀한 뜻을 기려 그뜻을 높이 받들어  이어가는 일에 매진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 남아있는생가터 주민들 공원으로

다행히 생가터는 남아 있었다. 선생의 장손 허경성(92) 씨가 자신은 전세를 살면서도 큰돈을 대출받아 1990㎡의 터를 사들여 2005년 구미시에 기부했다. 생가 건물은 자료가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생가 건너 쪽 야산에는 선생의 묘소와 유허비가 있고 그 바로 옆에 2009년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세워졌다. 김교홍 기념관장은 “선생의 집안은 논 3천 마지기(60만평)를 팔아 군자금으로 쓰는 등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했다.  기념관 아래에 선생의 호를 딴 왕산초등학교가 있다.

■ 죽음앞에서도 흔들림없는 기개 왕산허위

1908년 6월 11일 아침 오오타 기요마쓰 등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영평군 서면 유동에 있던 선생의 은신처를 덮쳤다. 헌병들이 의병 한 사람을 붙잡아 회유와 협박을 해 은신처를 알아낸 것이다. 선생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체포에 응했다. 13년 의병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선생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 지금 내가 죽을 곳을 얻었으니 너희 형제간이 와서 보도록 하라.”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심문을 받았다.

선생은 아카시에게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아카시가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마치 병자 몸뚱이를 주무르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마침내는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자 선생은 책상 위의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붉은 빛깔이지만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도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도 없이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아카시는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늠름한 태도에 감복하여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선생에게 존경을 표했다.

■ 왕산초상화 실제모습아닌 몽타주

현재 기념관등에 걸어둔 허위 선생의 초상화는 실제 모습이 아닌 러시아에서 미술을 전공한 증손녀 미라(60·3남 허준 손녀)씨가 왕산 모습의 설명을 듣고 그린 몽타주다.

선생은 1855년(철종 6년)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달은 대장이 되고 별들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란 글을 지을 만큼 한학에 능통했다.

관직에 나선 것은 44세의 늦은 나이였지만, 평리원 재판장(지금의 대법원장 격) 의정부 참찬, 칙임 비서원승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의 본관과 고향은 김해다. 임은동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김해에서 서울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허위의 증조부 허돈이 1807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처럼 왕산이 가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하며 결국 목습까지 잃었지만 그후손들의 삶은 비참하다. 장손자인 허경성옹은  고향 구미를 등지고 대구서 살고있고 자식들도 서울과 미국으로 가살고 있는 처지다.  그러나 구미시는 왕산선생 순직 100이 지났지만 지금껏 추모제한번 제대로 지내지 않았다며 민족문제 연구소 회원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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