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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성(草聖)으로 부르는 황기로(黃耆老)의 서예이야기이택용/경북도문화융성위원회 전통문화분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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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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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명필(名筆)이라고 말하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67)선생은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산림(山林)의 학자로 본분을 다한 서예가 이다. 본관은 덕산(德山)으로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ㆍ매학정(梅鶴亭)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김구(金絿)ㆍ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초서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았다.

선생은 선산의 명문가문 출신으로, 증조부는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 황구수(黃龜壽)이고, 황구수의 아들 황린(黃璘)ㆍ황위(黃瑋)ㆍ황필(黃㻶)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산고을에서 3형제가 문과 급제한 가문은 진주하씨 하위지(河緯地) 3형제와 덕산황씨 3형제가 유일하다. 조부은 황필이며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고, 아버지는 벼슬이 전 행사옹원참봉(前行司饔院參奉)을 역임한 황이옥(黃李沃)이다. 1534년(중종 29) 14세에 사마시(司馬試, 式年試 進士)에 입격하여 천재성을 보인 비범한 인물이었으며, 상주출신으로 영의정을 역임한 노수신(盧守愼)과 동방입격을 하였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주동인물 조광조(趙光祖)의 사사(賜死)를 주청한 아버지의 허물로 인해 스스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일찌감치 단념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렸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나중에 별좌(別坐)벼슬을 역임하였다. 필법이 뛰어났으며 특히 초서를 잘 써서 해동초성(海東草聖)이라 불렸다.

선생의 서체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만년에 낙동강의 서쪽 보천산 위에 매학정을 짓고, 필묵과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필적은 〈근묵(槿墨)〉ㆍ〈관란정첩(觀瀾亭帖)〉ㆍ〈대동서법(大東書法)〉ㆍ〈동국명필(東國名筆)〉ㆍ〈황고산법첩(黃孤山法帖)〉ㆍ〈조선명현필첩(朝鮮名賢筆帖)〉ㆍ〈경람첩(敬覽帖)〉ㆍ〈황기로서첩(黃耆老書帖)〉ㆍ〈조선명가필보(朝鮮名家筆譜)〉등에 필적이 전하고 있다. 1549년(명종 4)에 당나라 이백(李白)의 〈초서가행(草書歌行)〉을 쓴 초서필적이 석각(石刻)되어 전하는데,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 중 광초(狂草)를 방불하게 한다고 하였다.

금석문으로는 1547년(명종 2) 군위에 군위현감 이증영(李增榮)의 현감이공선정비(縣監李公善政碑), 1549년(명종 4) 진주에 조윤손묘비명(曺潤孫墓碑銘), 1555년(명종 10) 충주에 있는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9년(명종 14) 합천에 합천군수 이증영의 이영공유애비(李令公遺愛碑)의 비문을 썼다. 시판(詩板)으로는 안동에 이굉(李浤)의 정자 귀래정(歸來亭)에 기사와탄주인(寄謝瓦灘主人)이 있으며, 편액(扁額)으로는 영주 소수서원의 입구에 경렴정(景濂亭), 안동의 귀래정(歸來亭), 영주 전계초당(箭溪草堂)이 있다. 그가 닭털로 만든 붓으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원규(院規)는 지금은 전하지 아니하지만 서황고산계우초첩후(書黃孤山鷄羽草帖後)란 글이 문헌에 남아있다. 저서로〈고산집(孤山集)〉이 있다고 전하나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남명(南冥) 조식(曹植)과도 친교(親交)가 있어 성리학에도 심취하였다.

선생은 고향인 구미에 조부 황필의 유지(遺地)에 매학정이란 정자를 짓고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 삼아(梅妻鶴子)' 자연에 파묻혀 글씨 하나로 일생을 보낸 은일 처사이다. 실제 선생의 42세 때 모습은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목격한 바로는 󰡐빈 뜰에 매화송이 피어오르고 깊은 못에서는 학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10여리 떨어진 곳에서 텃밭을 일구는 신선 같은 사람‘ 이라 말했고, 주세붕(周世鵬)이 짓고 선생이 쓴 풍영정시첩(風詠亭詩帖)에 이황이 직접 ’그 시가 아름답고, 발문이 찬란할 뿐만 아니라 선생의 필적이 더욱 보배롭다.‘ 고 고백하고 있는 점은 서예의 경지를 증명한다. 더욱이 이황은 매학정시(梅鶴亭詩)에서 선생을 두고 ’백학이여 매화 늙음을 한탄치 마라. 장욱(張旭)처럼 글씨 쓰며 노년을 즐기리라‘ 고 노래하고 있다. 요컨대 이황의 순일(純一)과 선생의 일필휘지(一筆揮之)는 조형적으로는 극과 극일지라도 추호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오로지 한 점, 한 획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경(敬)이자 천진(天眞)의 세계로 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선생은 서예의 성인(聖人)으로 부르는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가는 초성이라 불리는 서예가였다. 이와 같이 구미는 초성을 배출한 서예의 도시다. 이번에 제4회 ’고산 황기로학생서예대전(孤山黃耆老學生書藝大展)‘을 개최한 충재(充齋) 연민호(延旻鎬)서예가 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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